분류없음 | Posted by 고추장찍은멸치 2011.03.31 15:18

경주 게스트하우스 306호

두 번째로 가는 경주 여행이다.(2011. 3. 28)
작년 여름엔 조카와 함께였지만, 이번엔 혼자이다.
먼 곳까지 혼자 여행하는 것은 처음이기에 두려움이 앞섰지만,
평일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매력인 '한가로움'을
즐길 수 있는 기회가 이번이 마지막일 것 같아 용기를 냈다.

경주를 선택한 이유는?
한번 가보았기에 조금은 만만해 보였고, 자전거 여행에 최적의 장소이며,
무엇보다 믿을 만한 숙박시설인 '사랑채'라는 한옥 게스트하우스가 있었기 때문이다.
'사랑채'는 중년의 부부가 운영하는 한옥으로 된 민박집으로, 규모는 작지만 여행 전문서적인 론리 플레닛에 실릴 정도로 외국 배낭객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아담하고 예쁜 한옥 집이다.
무엇보다 소박해 보이는 주인 부부가 마음에 드는 곳이다.
작년 여름에는 성수기라 예약을 놓쳐 아쉬웠기에, 이번에는 꼭 이곳에서 묵으리라는 기대가 한가득이었다.   

아뿔사! 그런데 처음부터 삐끄덕이라니ㅠㅠ
경주행 고속버스에 몸을 싣고 가벼운 마음으로 여행의 설레임을 즐기고 있던 중에...
'사랑채' 방이 이미 꽉 차버렸다는 청천벽력 같은 비보를 접해야 했다.
비수기의 평일이기에 방이 많이 있을 거라 믿고 예약을 안 한 게 실수였다. 설마했는데...
경주에 도착하면 저녁쯤 될 텐데, 이를 어쩔꼬?
모텔이나 여관은 친구랑 같이 가도 무서워서 잠을 설칠 정도로 겁이 많은 나였기에 당혹스러움은 극에 달했다. 
갑자기 타지에 혼자 내버려진 듯, 경주가 공포의 장소로 다가왔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살아나올 수 있는 법!
우선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관광안내소로 들어가 근처 숙박시설 문의를 했다.
경상도 특유의 경쾌한 사투리로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안내원의 웃는 모습을 보며
낯설게만 느껴졌던 경주가 친근하게 다가왔다.
다행히 경주역 근처에 게스트하우스가 하나 더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물어물어 그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입만 있으면 못 할 게 없다는 말이 실로 피부에 와닿았다.

'경주 게스트하우스'(간판은 외국인들을 배려해 영어로만 쓰여 있다)
경주역에서 그리 멀진 않지만 골목 한 구석진 곳에 빼꼼히 간판만 살짝 보이기 때문에 찾기에 만만치 않다.
하지만 실내로 들어서면 게스트하우스답게 널찍한 휴게실이 아늑한 인상을 풍기고,
푸근해 보이는 주인장 아저씨가 안내데스크에서 반가이 맞아준다.
다인실에서부터 2인실 4인실까지 방의 종류는 다양했고 숙박비 또한 저렴한 편이었다.
혼자 쓸 수 있는 3층 스위트룸으로 정하고 그곳에 짐을 풀었다.
일반 숙박시설과 다른 점은 각 방의 열쇠가 없다는 점이다. 
대신 방 안으로 들어가면 열쇠가 달린 사물함이 있어서 그곳에 짐을 보관하게 되어 있다.
방 열쇠가 없다는 말에 당황스럽긴 했지만 잠 잘 때 안에서 문을 꼭 잠그면 아무 염려 없다는 아저씨의 말을 믿기로 했다.
그래도 저녁 먹으러 외출할 때는 조금은 찜찜했다ㅋㅋ

7시쯤 된 경주 시내의 저녁은 서울과는 달리 어둠이 짙고 인적이 드물어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다.
저녁을 대충 때우고 게스트하우스 아저씨가 가보기를 권한 안압지로 발걸음을 옮겼다.
곳곳이 문화유적지라고 한 경주답게 경주역에서 얼마 가지 않은 곳에 안압지며 첨성대며 오대릉이며...
발 닿는 곳 하나하나가 역사책에서 방금 막 튀어나온 듯 내 앞에 생생하게 그 모습을 드러냈다.
시내에서는 사람 구경하기 힘들었는데, 정작 이곳에 오니 단체로 수학여행 온 초등학생과 중학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함초롱한 초롱불을 하나씩 든 초등학생들의 행렬은 마치 신라시대의 한 장면을 보듯 기분을 묘하게 만들었다.
밤하늘의 별 또한 서울과는 달리 신라시대의 기운을 발하는 듯 신비스럽게 보였다.
신라시대에 하늘을 관측했다는 첨성대 꼭대기에 올라가 별을 바라보면 그 기분은 어떨까?

쌀쌀한 밤공기를 털어내려 게스트하우스에 들어서자마자 원두커피를 한잔 마셨다.
따뜻함이 온몸에 퍼지면서 기분이 한결 나른해졌다.
라운지에서는 아저씨가 투숙객들과 함께 경주에 대한 소개로 얘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306호 내 방은 짐을 풀 때보다 한결 훈훈하게 느껴졌다. 씻을 때도 잠자리에 들 때도 전혀 무섭지 않았다.
밤새어 읽기로 한 <이야기 일본사>는 몇 장을 넘기지 못하고 이내 한켠에 내동댕이쳐졌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의 낯설음은 '내가 지금 왜 여기 있지?' 하는 물음을 던지게 했다.
기나긴 백수생활과 잠깐의 연애와 실연, 그리고 방황...일상에서 멀어져 있던 나의 삶.
너무 멀어져 있었기에 '일상'의 모습이 낯설기만 하고 두렵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동경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경주 여행이 끝나면 이제 일상의 궤도에 발을 들여놓고 운동화를 고쳐 매듯 내 주어진 삶에  열심히 임하리라.
여행이 주는 선물은 낯선 곳에서 낯선 모습의 나를 발견하게 해 주는 신선함인 듯하다.